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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语言交流]慰安妇:为了躲避日军甚至剃光了头发……

楼主#
更多 发布于:2007-03-17 16:47
일군 피하려 머리까지 다 잘랐지만

그 끔찍한 경험을 어떻게 극복했느냐고요? 나는 지금도 자주 악몽을 꿉니다. 극복이란 불가능합니다. 죽을 때까지 고통을 안고 살아야 하는 거지요. 나에겐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거예요.

15일 미국 의회 사상 처음 열리는 일본군 위안부 청문회에는 군위안부 피해자인 한국인 할머니 2명과 함께 푸른 눈의 백인 할머니가 나와 증언한다.

네덜란드인으로 호주 킹스우드 시에 살고 있는 얀 루프 오헤르네 씨. 올해 84세인 그는 꽃다운 나이인 19세 때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 군위안부 생활을 했다.

오헤르네 씨는 7일 본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60여 년 전 겪었던 끔찍한 경험, 그리고 그때의 일이 그 후 자신의 삶에 어떤 고통을 남겼는지를 생생하게 들려줬다. 일제에 의해 강제 동원된 군위안부들은 대부분 한국 등 아시아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 점에서 오헤르네 씨의 증언은 적잖은 충격과 파장을 던질 것으로 예상된다.

오헤르네 씨는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서 태어났다. 기술자인 아버지는 설탕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일했다. 화목한 가정에서 아름다운 숙녀로 성장하던 오헤르네 씨는 1942년 3월 자바 섬을 침략한 일본군에 의해 어머니와 함께 암바라와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3년 반 동안의 수용소 생활에 이어 1944년 군위안부 수용소(Comfort station)로 끌려갔다.

여성에게 첫 성 경험이 갖는 의미는 큽니다. 그 첫 경험이 성폭행, 그것도 군위안소에서의. 그것이 내 인생에 어떤 굴욕감과 정신적 상처를 남겼는지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추해 보이면 더는 남자들이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머리를 모두 잘라냈지만 오히려 일본군의 호기심의 대상이 됐다. 심지어 일본인 의사들도 성폭행 대열에 합류했다고 한다.

지옥 같은 군위안부 수용소 생활 3개월 반 만에 심신이 여지없이 무너진 오헤르네 씨는 다시 일반 수용소로 옮겨졌다. 그곳에는 같은 일을 당해 육신이 망가진 네덜란드인 여성 100여 명이 수용돼 있었다. 일본군은 만약 이 일을 밖에 나가 얘기하면 죽여 버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성폭행과 폭행, 굶주림으로 점철된 수용소 생활은 일본의 패전으로 3년 반 만에 끝났다.

군위안부 수용소에서 돌아온 뒤 어머니에게는 겪은 일을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울던 어머니는 절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고 그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생 가슴에만 담아 온 상처를 1992년 결국 토해냈다. 당시 유고 내전에서 여성들이 무참히 성폭행당한다는 뉴스에 세계가 분노하고 TV에서는 한국의 군위안부 피해자 3명이 공개석상에 나서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투쟁하고 있다는 뉴스가 방영됐다.

그동안 몰래 보관해 왔던, 자신이 수용소에서 겪었던 일들을 기록한 글을 우편으로 두 딸에게 보냈다. 딸들은 수기를 읽은 뒤 통곡하다 어머니를 찾아가 부둥켜안고 울었다.

이후 오헤르네 씨는 세계 각지에서 열리는 군위안부 관련 행사에 참석해 일본의 만행을 폭로하고, 전쟁으로 성폭행 피해를 본 여성들을 돕는 일에 여생을 바쳐 왔다. 일본 정부가 보상금 성격의 아시아 여성기금을 만들었을 때 오헤르네 씨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자선이 아니라 인간 존엄성의 회복입니다. 2년 전 일본을 방문했을 때 큰 충격을 받았어요. 고교생들이 일제가 저지른 일들을 전혀 모르고 있더군요. 일본 정부가 엄중히 사과하고 자라나는 세대에게 역사의 진실을 가르쳐야 합니다.

한국은 방문해 보지 못했다는 그는 한국인 친구가 많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몇 달 전에도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몇 분이 우리 집을 방문했어요. 말은 서로 잘 안 통했지만 금방 교감이 되더군요.

미국 의회로부터의 청문회 증인 출석 초청은 지난주에 받았다. 워싱턴으로의 여행에 남편이 동행하느냐고 묻자 남편은 11년 전 세상을 떠났다며 웃는다. 오헤르네 씨는 남편 루프 씨를 종전 직후 수용소에서 만났다. 그는 일제 패망 후 테러 공격으로부터 수용소를 지키기 위해 주둔한 영국군이었다. 그들은 영국에서 살다 1960년 호주로 이민했다. 이 대목에서 묻기 어려운 질문을 꺼냈다. 남편에게는 얘기를 했느냐고.

결혼 전 말했어요. 남편은 듣기만 하더군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그 후로 남편도 나도, 한 번도 그 얘기를 다시 꺼내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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沙发#
发布于:2007-03-17 16:48
“你说这么可怕的遭遇是怎么克服的?我现在还经常做噩梦。说克服,其实是不可能的事情。直到死都会带着这种痛苦。对我来说,战争还没有结束。”

美国议会史上第一次“日军慰安妇听证会”将于15日举行,届时,身为军队慰安妇受害人的两位韩国老奶奶和一位蓝眼睛的白人老奶奶将出席提供证言。

记者见到了目前生活在澳大利亚金斯伍德的荷兰人雅恩·鲁普·沃海勒耐。今年84岁高龄的沃海勒耐在自己如花般的19岁时被日本军队强行抓走,过上了慰安妇的生活。

沃海勒耐7日接受本报记者的电话采访时,开诚布公地讲述了自己60多年前的悲惨境遇,以及当时发生的事情给自己后来的生活留下了怎样的痛苦。很多人都认为,被日本帝国主义强行抓走的慰安妇大都是韩国人等亚洲女性。因此看来,沃海勒耐的证言可能会产生不小的冲击和影响。

沃海勒耐出生于荷兰的殖民地——印度尼西亚的爪哇岛。她的父亲是一名技术人员,在普兰塔寻农场工作。沃海勒耐曾经是在一个幸福和睦的家庭中快乐成长的美丽少女,但1942年3月,她和母亲一起被侵略爪哇岛的日本军队强行抓到了安巴拉瓦的强制收容所。在收容所中艰难度过三年半时间后,她又于1944年被抓到了军队慰安妇收容所(Comfort station)。

“对于女性来说,第一次性经历具有很重大的意义。但我的第一次是性暴力,而且还是在慰安妇收容所中……根本无法用语言来表达这些遭遇给我的人生留下的屈辱和精神创伤。”

原来以为,如果看起来很丑陋,男人就不会感兴趣,所以把头发都剃光了,但反而成了日本军人好奇的对象。据说,甚至连日本医生也加入了性暴力的行列。

在地狱般的慰安妇收容所中度过了三个半月后,沃海勒耐的身心完全崩溃,后来又被转移到了普通收容所。经历同样的遭遇、身体完全崩溃的100多名荷兰女性被收容在那里。日本军队方面警告说:“如果把这件事泄露出去,就会被杀死。”从性暴力、暴行到饥饿,这种地狱般的收容所生活终于在三年半以后,因日本战败而宣布告终。

“从慰安妇收容所中返回以后,我如实对母亲讲述了自己经历的事情。悲伤绝望地搂着我痛哭的母亲嘱咐说,千万不要对任何人说这些事。我也答应这样做。”

但是,她终于在1992年透露了一直都藏在心里的伤痛。当时,在南斯拉夫内战中女性悲惨地遭受性暴力的新闻令全世界震怒,电视里还播放了3名韩国的慰安妇受害者在公开场合和日本政府做斗争的新闻。

沃海勒耐把一直秘密保管的,记录自己在收容所中经历的遭遇的文章用邮包邮给了两个女儿。女儿们读了母亲的手迹后,痛苦不已,并来到母亲那里搂着母亲痛哭。

后来,沃海勒耐不断参加在世界各地举行的慰安妇相关活动,揭露日本的野蛮暴行,为帮助在战争中遭受性暴力的女性贡献自己的余生。日本政府推出赔偿金性质的“亚洲女性基金”时,沃海勒耐断然拒绝。

“我们想要的不是‘慈善’,而是‘恢复人类的尊严’。两年前访问日本的时候,曾受到巨大冲击。因为,高中生完全不知道日本帝国主义的残忍暴行。日本政府应该严肃道歉,并告诉正在成长的下一代真实的历史。”

未曾访问韩国的她自豪地说:“我有很多韩国朋友。”

“几个月前,几位韩国的慰安妇受害者来到了我家。虽然语言不通,但很快就建立了友谊。”

她于上周收到了美国议会发来的作为证人出席听证会的邀请。在问道丈夫是否会陪同前往华盛顿时,她笑着说:“丈夫已经在11年前离开了这个世界。”停战以后,沃海勒耐在收容所内遇见了丈夫鲁普。他是日本帝国主义战败后,为了保护收容所免遭恐怖分子袭击的驻当地的英国军人。他们在英国生活,然后于1960年移民澳大利亚。在这个时候提出了很难问出口的问题。对丈夫说这些了吗?

“结婚前就说了。丈夫静静地听。呆呆地留下了眼泪……后来,我和丈夫一次也没再提这些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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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凳#
发布于:2014-12-12 20:28
有时候日语学着学着遇到某些敏感词,都会不自觉心里不舒服。
游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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