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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语言交流]日军司令官在日记中承认曾在朝鲜实施堤岩里大屠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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更多 发布于:2007-03-17 17:03
학살 인정땐 제국에 불이익 저항해서 살육으로 꾸미자

1919년 31운동 당시 일본군이 저지른 제암리 집단 학살사건을 조선군사령부(당시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 사령부를 뜻함)가 철저히 은폐했음을 보여 주는 사령관의 일기가 발견됐다.
아사히신문은 31운동 당시 조선군사령관이던 우쓰노미야 다로(18611922) 대장이 남긴 15년분의 일기가 발견됐다고 28일 보도했다.

작성자 사후 80여 년 만에 봉인이 풀린 일기에는 제암리 사건의 은폐 전말과 독립운동 진압 실태, 일본의 민족운동가 회유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돼 주목된다.

1919년 4월 15일 제암리 사건이 일어나자 우쓰노미야 대장은 서울 남방에서 일본군이 약 30명을 교회에 몰아넣고 학살, 방화했다고 썼다. 그러나 일본군은 사건을 발표하면서 학살 방화 사실을 부인했다.

그 이유는 4월 18일자 일기에 나온다. (사실대로 처리하면) 제국의 입장에 심히 불이익이 되므로 간부회의에서 저항했기 때문에 살육한 것으로 하고 학살 방화 등은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밤 12시에 산회했다는 것.

이튿날 일기에는 사건에 관여한 중위를 진압 방법과 수단이 적정치 않았다는 점에서 30일간 중근신에 처하기로 결심했다고 적었다. 이 신문은 실제로 해당 중위에게 30일간의 근신처분이 내려진 사실이 있다고 확인했다.

일기에 따르면 우쓰노미야 대장은 당초 조선 민중의 저항에 나름대로 이해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31운동이 시작되자 우쓰노미야 대장은 일본이 펼쳐 온 무단 통치 방식을 비판하며 조선인의 원망과 한탄 동요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일기에 적었다. 그는 독립운동은 기독교도와 천도교도, 학생 등이 주도해 외국인 선교사의 후원을 받아 봉기한 것으로 뿌리가 깊다고 분석하며 무단 통치가 내키지 않아하는 처녀를 무리하게 결혼시킨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소요가 갈수록 확산되자 그는 지금까지의 진압 수단으로는 도저히 대처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3월 11일 조선총독에게서 군 동원을 허가받아 진압을 시작했다.

한편으로 일기에는 우쓰노미야 대장이 훗날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 시대에 진행된 문화 정치 시책을 한발 앞서 시작한 사실도 나타난다.

그는 31운동 와중에 천도교에 대한 회유를 제안하고(1919년 3월 20일), 장차 조선에 자치를 허용해 자치식민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본국에 진언하기도 했다(5월 1일 육군대신 다나카 기이치에게 보낸 서한). 배일파로 알려진 조선인과의 접촉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1920년 2월 20일, 4월 9일).

일기에는 31독립선언에 서명한 한 종교지도자가 2월 27일 자신을 찾아와 이번 고종의 국장 때 뭔가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충고했다는 내용도 보인다.

우쓰노미야 대장이 남긴 사료는 일기 15권 외에도 서한 약 5000통과 서류 약 2000점, 사진 약 200점 등 7200여 점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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发布于:2007-03-17 17:04
在最近发现的日军司令官日记中记载,1919年爆发3.1运动时,日军实施了堤岩里大屠杀。而朝鲜军司令部(当时在韩半岛驻扎的日军司令部)隐瞒了该事实。

《朝日新闻》28日报道说,发现了3.1运动时朝鲜军司令官宇都宫太郎(1861~1922年)写的长达15年的日记。

在作者去世80多年后公开的这本日记详细记录了隐瞒堤岩里大屠杀的始末、镇压独立运动的情况、笼络日本民族运动家的过程。

1919年4月15日“堤岩里事件”发生后,宇都宫太郎在日记中写道:“在首尔南部地区日军将约30人关在教堂里进行屠杀并纵火。”但当时日军对该事件否认屠杀和纵火事实。

宇都宫太郎在4月18日的日记中叙述了否认实施屠杀的理由。“(如果承认事实)帝国的立场就会非常难堪,所以我们在干部会议上决定对外宣称因遭到抵抗进行杀戮,但否认屠杀和纵火事实。会议一直持续到晚上12点。”

宇都宫太郎在第二天的日记中写道:“因为镇压方式和手段不合理,对参与事件的中尉采取了禁闭30天的处罚。”《朝日新闻》也证实该中尉曾受到30天禁闭的处分。

从日记中可以看出,宇都宫太郎对朝鲜民众的抵抗有自己的看法。3.1运动爆发后,宇都宫太郎批评日本“武力统治” 的方式。他在日记中写道:“朝鲜人反抗、怨恨、动摇是很自然的事情。”他分析说,独立运动的主要力量是基督教教徒、天主教教徒、学生,并且得到外国传教士的支援,所以根深蒂固。他还批评说:“武力统治就像将不愿意的姑娘强行嫁出去。”

但随着暴乱日益升温,宇都宫太郎认为:“靠一直实行的镇压手段无法应付。”所以,他在3月11日得到朝鲜总督动用军队的批准,开始镇压独立运动。

另外,日记中显示,宇都宫太郎比后来的朝鲜总督齐藤宝更早实施了“文化政治”政策。

他在3.1运动爆发后积极笼络天主教(1919年3月20日),并向本国政府建议未来要允许朝鲜“自治”,将朝鲜设立为“自治殖民地”(5月1日致陆军大臣田中义一的信)。他还与“排日派”朝鲜人积极接触(1920年2月20日和4月9日)。

他在日记中写道,在《3.1独立宣言》上签名的一位宗教领导人2月27日找到自己,给予忠告说:“在这次为高宗举行国葬时将发生一些事情,请小心。”

宇都宫太郎留下的史料除15本日记以外,还有约5000封书信和约2000份文件以及约200张照片等共计7200多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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