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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语言交流]李熙升穷其一生为守护我们的语言而奋斗

楼主#
更多 发布于:2007-03-17 17:05
우리말 지키기 한평생

이희승 선생은 구한말(1896년)에 태어나서 국어학자로, 시인으로, 문장가로 활동하면서 이 땅의 지성인으로 살다 갔다. 이 책은 저자가 80세가 넘어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쓴 자서전이다.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36년, 제1, 2차 세계대전, 미군정, 625전쟁, 자유당과 민주당 정권, 군사혁명과 공화당 정권을 겪으며 기구한 세월 속에서도 우리 문화, 특히 국어를 지키고 키운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내용을 기록한 저술이다.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은 소년이 보고 들은 일들, 당시로서는 생소한 언어학을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가출한 일, 한성외국어학교를 시작으로 여러 학교를 거쳐 중앙학교를 20세가 되어서야 졸업한 일, 31운동 때 태극기를 그려 돌리면서 만세를 불렀고 동지들과 등사판으로 지하신문을 만들어 돌린 일. 이 같은 일화들이 입지전적인 기록으로 펼쳐진다.

재수를 하면서까지 조선어문학과가 있는 경성제국대 예과에 30세의 만학도로 입학하여 드디어 언어학 공부의 꿈을 이루었고 대학의 낭만을 즐기며 친구들과 어울리던 일은 그의 삶을 윤택하게 한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이화여전 교수로서 여성 문인들을 길러낸 일, 조선어학회에 참여하여 맞춤법 통일안, 표준어 사정,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제정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국어생활을 생각할 때 길이 찬양될 일이다.

그러나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3년간이나 옥고를 치르는 동안 악랄한 고문을 받았고 굶주림과 질병을 이기지 못하고 동지들이 죽어나간 일들은 개인의 고난이자 우리 문화의 시련이었다. 출옥하자마자 일제의 국어 말살 정책으로 폐사 직전에 있던 국어를 살리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고, 경성대를 재건하기 위한 일을 맡아 교수가 된 것은 우리 문화의 재건을 위해 다행한 일이었다.

이 땅 비극의 단면을 보여 주는 일도 많다. 625전쟁 중 928수복 전날, 전투의 와중에서 한밤중에 집이 불에 타는 바람에 온 가족이 몸만 빠져나온 일이나, 14후퇴 때 부산까지 1000리 길을 걸어갔다가 어머님의 임종에 겨우 맞춰 돌아와, 흩어진 가족을 아슬아슬하게 찾은 일이 그것이다.

그는 419혁명 때는 교수 시위에 앞장섬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케 했다. 이는 그의 선비정신을 그대로 보여 준다. 정년퇴직 후 동아일보 사장, 사립대의 대학원장, 동양학연구소장을 거치면서 한가롭게 쉴 틈이 없었던 것은 그가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이기도 하였지만 몸에 밴 근면성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은 한번 손에 잡으면 끝까지 읽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그 안에 담긴 사건이 기구하고 문장이 평이하다. 무엇보다도 그 안에 흐르는 정신이 우리를 감동시킨다. 이 책은 남산골 딸깍발이의 선비정신이 20세기를 거치는 동안 현대의 지성으로 성장하여 간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저술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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沙发#
发布于:2007-03-17 17:06
李熙升先生在旧韩末时期(1896年)出生,作为国语学家、诗人、作家展开活动,作为这片土地的知识分子奋斗了一生。该书是作者年过八十后以亲身经历为中心写的自传。其中记录了经历大韩帝国和日帝强占期36年、两次世界大战、美军政期、6·25战争、自由党与民主党政权、军事革命与共和党政权等,在崎岖的岁月中,他始终守护和培养我们的文化,尤其是国语。

因庚戌国耻而失去国家的少年所见所闻,决心一定要学习在当时来讲还比较生疏的语言学而离家的事,从外国语学校开始经过多个学校,到20岁才从中央学校毕业的事,3·1运动时,画上太极旗到处分发并高呼万岁,与同志们一起用油印机制作地下报纸散发的事……像这样的轶事作为一个个独立的记录展现在读者们的眼前。

甚至当复读生,在30岁作为“老学生”进入有朝鲜语文学系的京城帝国大学的预科,终于完成了学习语言学的梦想,而且享受大学的浪漫,与朋友们一起快乐度过的事,这些都成为了润泽他的人生的基础。担任梨花女专的教授,培养一大批女文人的事,参加朝鲜语学会,在拼写法统一案、标准语矫正、外来语表记法统一案的制定过程中他起到中心作用,今天我们能够享受的国语生活,有他的一份功劳,这是应该长久受赞扬的事。

但因朝鲜语学会事件,蹲了三年大狱的期间,身边的同志们受到严刑拷打,没能战胜饥饿和疾病而相继死去,这既是他个人的苦难也是我们文化的磨难。他一出狱就为了拯救在日帝的国语抹杀政策下面临‘死亡’的国语而东奔西走,并肩负起重建京城大学的重担,成为了教授,这对于我们文化的重建,是一大幸事。

书中还有很多展现出这片土地悲剧性一面的事情。如,6·25战争中,在9·28收复的前一天,在战斗的漩涡中,家里突然失火,全家人只保住了性命,所有的财产被烧成灰烬,在1·4撤退时,徒步走了大约1000里路走到釜山,又因母亲临终而千辛万苦赶回来,艰难地寻找失散的家人。

他在4·19革命时,在教授示威活动中打头阵,促使李承晚总统下台。这直接展现出了他的儒士精神。在退休后,随着担任东亚日报社社长、私立大学的研究生院院长、东洋学研究所所长,一直没有休息时间,一方面是由于他的能力超群,但也同时展现出了在他身上根深蒂固的勤勉性。

这本书,只要一拿起来,就让人欲罢不能,不看到最后不会想要罢休,书中的事件非常起伏跌宕,文笔非常流畅。最重要的是书中流露出的精神会让我们深受感动。这本书将贫穷学者的儒士精神经过20世纪成长为现代知性的面貌原原本本地展现出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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